이천이십육년 시월

 시월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월. 원래는 시월 일일부터 마음이 막 싱숭생숭하면서도 설레고 그랬어야 하지만..

- 우유가 많이 아팠다. 하필 샌프란에 가있을 때 일이 벌어져서 미친 사람처럼 울면서 걸어다녔다. 하지만 샌프란엔 펜타닐 중독자가 워낙 많으니 내가 그렇게 이상하게 보이진 않았을지도.. 한국 낮 시간에 자다가 소식 놓칠까봐 잠도 잘 못 자고 한동안 정신 놓고 지냈다. 내가 우유 두고 여길 왜 왔을까 자책을 하다가, 우유 데리고 왔으면 여기서 병원이나 제대로 갈 수 있었을까 그 생각도 하다가, 다시는 우유를 못 보면 어떡하지, 무서워하다가.. 오만 생각과 후회와 기도를 하며 며칠을 보냈다. 다행히 우유는 몇 차례의 위기를 잘 넘기고 많이 회복했다. 검사 결과도 가장 바라던 대로 나왔다. 당분간은 치료가 필요하겠지만 그래도 나을 수 있는 병으로 밝혀졌다. 우유가 지금까지 내 곁에 있어준 시간만큼만 나와 더 함께 있어줬으면 좋겠다. 정말로.. 

- 정신을 차리고. 좀 많이 자고. rec과 수업도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간만에 카페 가서 메일 답장도 썼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심도 있는 고민을 했다. 이번 사태로 나의 1년 계획에 상당한 변동이 불가피해졌다. 우유가 중요하니까 우유니는 포기하기로 했다. 디즈니월드도 깔끔하게 포기. 콜로라도 스키 여행? 포기.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디즈니를 좋아하고 겨울마다 보드 탔다고.. 오바하지 않기로 했다. 우유니는 지금 아니어도 언젠가 갈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 한숨 돌리고 보니 벌써 시월도 반쯤 지나있다. 시월 중 가장 좋아하는 날은 아직 오지 않았고, 두번째로 좋아하는 날은 지나갔다. 천사같은 룸메 아가가 얼마 전 '언니 생일에 우리 집에 사람들 불러서 파티할까요?' 라고 물어봤는데.. '그래.. 파티 좋지.. 네가 하고싶다면 해.. 근데 그럼 나는 나가있을게..' 라고 답했다. 룸메 아가도 웃고.. 나도 웃고.. 어색한 영어 스몰토크로 생일을 보내고 싶지 않아.. ㅠ '그냥 마라탕이나 먹으러 가자, 우리..' 로 대화를 마무리. 

- 여기 온지 두달이 지났고, 룸메 아가에게 테니스를 가르친 지도 한달이 넘었다. 처음 왔을 땐 저녁 8시까지도 환했는데 이제는 6시 반이면 해가 진다. 나야 한량이지만 룸메 아가는 바쁘고 퇴근도 이르지 않기 때문에 점점 수업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워진다. ㅠ 그래도 룸메 아가는 성실한 학생이다. 운동 신경도 제법 있어서 가르치는 재미가 있다. 다만.. 나도 잘 못 치는데 얘를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 게 맞나? 내가 좋은 선생이 맞나? 하는 회의가 들 때도 많다. 더 추워지기 전에 백핸드까지는 진도를 마치고.. 내년 봄에는 랠리를 시도하겠다.

- 청강생은 시험기간엔 수업에 안 들어가도 되기 때문에, 진짜 대학생일 때와는 다르게 시험기간을 기다리게 된 아이러니.. 미국 대학생들도 시험기간엔 벼락치기하느라 눈밑 퀭해지고 그러는 거 보니 좀 재밌다. (미안) 수업을 듣다 보면 감탄할 때가 좀 있다. 왜 우리는 이런거 대학 때 안 가르칠까? 아니 적어도 수습 때는 얘기해줘야 했던 거 아닐까? (다 배우고 들었는데 내가 기억 못하는 걸 수도 있음) 싶은 것도 많고. 십몇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만 배우고 그걸로 달달 볶이고 살았는데, '왜' 해야 하는지를 처음부터 되짚는 느낌. 일을 안 해서 그런가, 거룩하고 희망찬 이론만 들어서 그런가, 요새는 또 나의 업이 제법 맘에 드는.. 것 같기도.. 해..   

- 내 추구미는 오랜시간 단호한 인간이었는데, 요새는 다정한 인간이 멋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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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CAGO

조던과 오바마와 딥디쉬 피자의 도시 시카고.

2026년 9월 기준 내 마음 속 '미국에서 가장 멋진 도시 1위'에 랭크된 시카고. 

일단 가자마자 점심 대강 먹고 앤더슨빌을 거닐었다. 앤더슨빌이 COMO 다운타운보다 큰데.. 시카고엔 이런 동네가 한 40개는 된다고 했다. 서점 가서 드디어 영어 소설도 한 권 사고. 중고샵에서 한국서 100만원에 육박하는 가을 자켓을 10만원 언더로 득템했다. 너무 좋은 동네 아니냐고. 그냥 걷는 것만으로 응원 받는 느낌. 모두가 내 편 들어주는 느낌. 하나도 안 무서운 느낌. 나중에 친구 말고 애인이랑 같이 오고 싶은 느낌. 

 

미드 웨스트에선 피클 튀김을 먹어야 한다고 해서.. 맥주 안주로 피클 튀김을 시켜보았다. 상상한 그대로의 맛이다. 피클을 튀긴 맛.. 이런 요리가 왜 존재하는 거지? 라고 생각했으나 먹다보니 나름 바삭하고 상큼해 ㅠ 또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ㅠ ㅋㅋㅋ

늦은 오후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맥주를 마셨는데 추웠다. 기모 후드티 입었는데도 몸이 으슬으슬했다. 결국 감기를 얻었다. 미주리는 아직 반팔 가능인데.. 댈러스랑 샌프란도 반팔 입어야 한댔는데.. 시카고는 북쪽 동네구나.

 

마치 해리포터에 나올 것 같은 비밀골목에 들어가니 만화가게가 나왔다. 올컬러 아이언맨 에피소드를 보고 구입을 잠시 고려했으나 50불은 좀 개오바인 것 같아서 진정했다. ^^;;; 시카고에서 멋진 기념품을 하나쯤 사오고 싶었는데 눈에 들어오는 게 없어서 포기했다. 다시 냉장고 자석이라도 모아야 하나. 

 

오바마 대통령 센터에 갔다. 박물관은 몇달치 예약이 밀려있다고 해서.. 못 들어갔다. 박물관 인근 캠퍼스만 봐도 충분히 멋지다고 해서 일단 가긴 갔는데.. 멋지긴 한데.. 멋진 공원은 미주리에도 많아요. 박물관을 못 가서 매우 아쉽. 기념품샵도 아직은 체계(?)가 잡히지 않아 별로 살 게 없었다. 박물관 예약하려면 날짜 맞춰 광클해야 하는 것 같던데 어쨌든 내년엔 꼭 예약해서 가봐야겠다고 다짐.

 

박물관에는 못 들어갔지만 박물관 앞의 오바마 부부 동상은 보고 왔다..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줄이 굉장히 길었다. 

근처에 주말마다 열리는 파머스 마켓이 있어 둘러봤다.. '둘러만' 봤다. 좀 비싸고 생각보다 규모가 작았다. 활기 찬 미국인들의 웃음소리는 듣기 좋았다. 

 

밀레니엄 파크의 그 유명한 빈. '나 그 땅콩 보고 싶어' 했더니 '땅콩 아니라 빈이야' 하는 말을 들었는데 그게 그거 아님? ㅎ 청명한 가을하늘과 시카고의 멋진 건물들이 반사돼 확실히 멋졌다. 정말 반질반질 반짝반짝해서 누가 닦는 건지 궁금했다. 

요 인근에 미술관 박물관도 많았는데 제대로 못 봤다. 큰 흥미도 없었지만 ㅎㅎ 그래도 과학 박물관은 꼭 가고 싶었는데 찍먹만 하고 나오긴 아쉬워서 담번에 자전거 타고 가기로 다짐. 

 

호수가 진짜 크면 바다보다 좋다는 걸 시카고 가서 알게 됐다. 바다 짠내(난 좋아하긴 하지만)도 안 나고, 물빛은 에메랄드. 내가 본 어떤 바다보다 물빛이 예뻤다. 해변(정확히는 호변..?)에는 해초가 없다. 호수를 끼고 조깅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네이비 피어 하이라이트, 관람차. 혼자 탔다. 정말 좋았다. 좋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좋았다. 3바퀴 돌았는데 행복해서 울컥했다. 눈물날 뻔 했다. ㅋㅋ 8불 더 내고 패스트 패스를 끊었는데 돈이 아깝지 않았다. 하나도 안 기다렸고 혼자 전세 내고 탔다. 앞 뒤 오른쪽 왼쪽 호수가 모두 내꺼~

관람차 옆에 있는 하늘 그네 놀이기구도 탔다. 이거 되게 좋아한다. 어린이대공원에 요런 게 있어서 갈 때마다 탔고.. 한 8년 전쯤 남쪽 어느 조용한 놀이공원에서도 한 번 탔는데.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이번엔 좀 멀미가 났다. 그래도 호수 바람은 시원하고, 하늘은 눈이 시리게 파랗고, 꿈 속에서 나는 것 같았다. 

 

관람차에서 본 풍경.

 

밀레니엄 파크에 있던 누워있는 자유의 여신. 뉴요커들 혹시 긁!? 하지만 뉴요커들은 시카고 신경 안 쓰겠지.. 내가 볼 땐 시카고 사람들이 뉴욕 사람들한테 잘 긁히는 것 같다. ㅋㅋㅋ

 

우유 사촌동생 우주. 밤마다 내 몸 위에서 잠을 청하셔서 정말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우유와 자는 것 같았다. ㅎㅎ 너도 참 낯을 안 가리는구나. 

 

시카고 최고 명문 로욜라~ 어떻게 학교 옆에 해변(호변)이 있음? 정말 최고야. 

 

해변(호변) 방파제에 앉아서 한참 물을 구경했다. 비행기가 많이 지나갔다. 하늘길이 넓어서 비행기 100번 찰칵 찰칵 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시칠리아식 식사. 단 하나도 빠짐없이 맛있었다. 특히 난 저 샐러드 파스타가 좋았다. 

시카고에서 매일 테마를 잡고 식당을 돌았다. 아시아 특집, 미국 특집, 유럽 특집. ㅎㅎ 시카고 딥디쉬 피자도 물론 먹었고.. 남으면 포장해서 집에 가지고 가려고 했는데 단 한조각도 남기지 않았다..

 

귀여운 아시안 식당의 포스터.. 생성형 AI 사용이 보편화되기 전부터 있던 포스터라고 한다. ㅋㅋㅋ AI 안 쓰고.. 어떻게.. 이런 걸 만드셨어요..?

 

시카고 불스 홈구장 유나이티드 센터. 사실 내게 시카고 = 시카고 불스 혹은 컵스.. 였다. ㅋㅋ 내가 불스 홈구장에 와서 조던 동상을 보게 되다니. 요새 가끔 '내가 미국에 있다고..? 여기가 미국이라고..?' 하는 어리둥절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조던 동상을 볼 때도 그랬다. 

 

굿맨 극장에서 'The Attic' 공연을 봤다. 2시간짜리 영어공연을 내가 안 졸고 다 볼 수 있을지 약간 의문이었는데 단 한 순간도 졸지 않았다. 졸기는커녕 손이 따갑도록 박수를 치고.. 공연 시작 한 15분이 지난 후부터는 입을 벌리고 봤다. 너무 멋지고 놀라운 장면의 연속이라 도저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기예의 수준에 경외감이 들었다. 전부 알아듣지는 못했어도 절박함에 눈물이 났다. 공중그네 타는 분과는 거의 사랑에 빠졌다. (요새 사랑에 쉽게 빠지는 경향이 있긴 함) 공연 끝나자마자 한 말.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후회 없는 2시간이었다. 

 

각 잡고 간 첫 여행. 옥수수밭 지그재그로 쪼개며 왕복 12시간 운전한 것도, 하루 2만7천보씩 걸은 것도 좋았다. 근데 아직 못한 게 많아서.. 또 갈 거야, 시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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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일

오기 전에 '이메일 보내'라는 말을 많이 하고 왔는데. 진짜로 오는 메일들을 보니 기분이 좋다. 

사랑하는 4D는 벌써 트리플 크라운을 만들어줬다. 

지금은 또 후배의 메일을 보고 아주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맞아. 나 사실 까먹고 있었어. 근데 덕분에 새삼 생각났어. 고마워. 뿌듯해. 자랑스러워. 나도, 너희도. 

메신저만큼 빠르지 않은, 메일의 속도가 좋다. 꾹꾹 눌러서 좀 많은 얘기를 쓰고, 돌아온 얘기들을 읽고, 또 다시 꾹꾹 눌러서 답장을 하는 게 좋다. 낯 간지러워서 하지 못했던 말들도 메일로 쓰면 쓸만 하다. 

그니까, 메일 보내. 답장할게. 바로는 아니더라도, 꼭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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